마에바라 잇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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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에바라 잇세이는 조슈 번 출신의 무사로, 메이지 유신 시기에 활약했다. 1834년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태어나 쇼카손주쿠에서 요시다 쇼인에게 사사받았으며, 막부 타도 운동에 참여하여 간성대 대장으로 활동했다. 메이지 정부 수립 후에는 병부대보를 역임했으나 징병제 반대로 낙향했다. 이후 조슈 번 군대 해체에 반발하여 하기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1876년 처형되었다. 그는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여러 영상 작품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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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바라 잇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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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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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마에바라 잇세이 |
본명 | 미하라 도모유키 (三原 友之) |
출생 | 1834년 4월 28일 |
출생지 | 나가토국 도하라 마을 |
사망 | 1876년 12월 3일 |
사망지 | 나가토국 하기 |
묘소 | 하기 |
활동 | |
활동 | 도막 운동 하기의 난 |
소속 | 조슈번 |
관직 | |
제2대 병부대보 | 1870년 1월 3일 ~ 1870년 9월 26일 |
참의 | 1869년 7월 8일 ~ 1870년 9월 26일 |
서훈 | |
추증 | 증 종4위 |
2. 일생
1834년 나가토국 쓰치하라 촌(지금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태어나 메이지 유신과 하기의 난을 거쳐 1876년 사망하기까지의 일생은 다음과 같다.
마에바라 잇세이는 1834년(덴포 5년) 조슈 번 번사 사세 히코시치의 장남으로 태어나 마에바라 가문에 입양되었다.[7] 1839년(덴포 10년) 아버지와 함께 후나키 촌으로 이사하여 하기시 시내까지 공부하러 다녔다. 1851년(가에이 4년) 본가로 돌아와 집안일을 도왔고, 1857년(안세이 4년)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요시다 쇼인에게 배웠다.
1862년(분큐 2년) 번정 개혁이 미뤄지자 탈번 후 나가이 우타(長井雅楽) 암살을 계획했고, 1863년(분큐 3년) 시모노세키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간성대(干城隊) 대장이 되었다. 메이지 유신까지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1868년(메이지 원년) 보신 전쟁에 참전했다. 1870년(메이지 3년) 일본군으로 흡수된 후 600석 영지를 하사받고 에치고 지방법원 판사, 참의(参議), 병부대보(兵部大輔, 국방부 차관)를 역임했지만, 징병제 반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밀려 낙향했다.
1876년 메이지 신정부의 군대 해체에 반발하여 하기의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43세. 그의 유해는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고보지에 안장됐다.[8]
유언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2]
- 吾今国の為に死す、(내 지금 나라를 위해 죽네)
- 死すとも君恩に背かず。(죽더라도 임금의 은혜를 등질 수 없도다)
- 人事通塞あり、(인간사 통하면 막히는 일도 있느니)
- 乾坤我が魂を弔さん。(천지 나의 혼에 조의를 표하노라)
2. 1. 출생과 성장
1834년(덴포 5년) 나가토국 쓰치하라 촌(土原村, 지금의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조슈 번 번사 사세 히코시치(佐世彦七, 봉록 47석)의 장남으로 태어나 마에바라 가문에 입양되었다.[7] 마에바라 씨의 시조는 센고쿠 시대 때 아마고 십용사(尼子十勇士) 중 하나인 요네하라 쓰네히로(米原綱寛)이다.1839년(덴포 10년) 아사군(厚狭郡) 군청의 아전(郡吏)이 된 아버지와 함께 후나키 촌(船木村) 사택으로 이사했다. 거기서 하기시 시내까지 공부하러 다녔다.
1851년(가에이 4년) 다시 후나키 촌 본가로 돌아와 도기 제조 및 집안 농사일을 도왔다.
1857년(안세이 4년)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 등과 함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다녔다. 요시다 쇼인이 1859년(안세이 6년) 처형된 후에는 나가사키에서 서양 학문을 닦았고, 조슈 번의 서양 학문소인 박습당(博習堂, 하쿠슈도)에서 배웠다.
2. 2. 쇼카손주쿠 수학과 존왕양이 운동
1857년(안세이 4년) 구사카 겐즈이, 다카스기 신사쿠 등과 함께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 들어갔다. 스승 요시다 쇼인이 3년 후 서양 밀항을 시도하다 붙잡혀 처형된 후 쇼카손주쿠는 폐교되었고, 나가사키에서 서양학을 배웠다. 조슈 번 내에 서양식 학교인 박습당(博習堂, 하쿠슈도)이 건립되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7]1862년(분큐 2년) 번정 개혁이 미뤄지고 보수파 인사들이 권력을 잡자 탈번 후, 구사카 등과 함께 번내 보수 인사 중 하나인 나가이 우타(長井雅楽) 암살을 계획했다.[7]
1863년(분큐 3년) 탈번은 사족 신분을 포기한다는 의미였기에, 유히쓰야쿠(右筆役, 행정서사-공문서 대필) 일을 했다. 분큐 정변으로 교토에서 조슈 번으로 쫓겨온 일곱 공경(公卿) 거처에 용달을 하기도 했다.(七卿方御用掛) 이후 다카스기 등 동지들과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하고 간성대(干城隊) 대장이 되어 막부 타도 운동에 매진했다. 1차 조슈 정벌 때는 오구라 방면군 참모로서 막부 군에 맞서는 등 메이지 유신까지 많은 전공을 세웠다.[7]
2. 3. 막부 타도 운동과 메이지 유신
1863년(분큐 3년) 마에바라 잇세이는 탈번하여 사족 신분을 포기하고 유히쓰야쿠(右筆役, 행정서사·공문서 대필) 일을 했다. 분큐 정변으로 교토에서 조슈 번으로 쫓겨온 일곱 공경(公卿) 거처에 용달(七卿方御用掛)도 했다. 그러다 다카스기 신사쿠 등 동지들과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구데타를 일으켜 성공하고 간성대(干城隊) 대장으로서 막부 타도 운동에 매진했다. 1차 조슈 정벌 때는 오구라 방면군 참모로서 막부 군에 맞서는 등 메이지 유신까지 많은 전공을 세웠다.[7]1868년(메이지 원년) 보신 전쟁에는 호쿠에쓰 전쟁(北越戦争)까지 참전해 나가오카 성(長岡城) 공략전 등 아이즈(会津) 방면에서 참모로 활약했다.[7]
1870년(메이지 3년) 각 번의 사병들이 일본군으로 흡수된 후 그도 은상(賞典禄)으로 600석 영지를 하사받았다. 에치고 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됐고 일본 중추원 참의(参議)에 올랐다. 오무라 마스지로가 암살된 후 병부대보(兵部大輔, 국방부 차관)를 겸했지만 업무 태만으로 탄핵되기도 했다. 또한 징병제 실시에 반대해 기도 다카요시(木戸孝允, 가쓰라 고고로)와 갈등을 빚었다. 결국 징병제를 지지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에게 밀려 낙향했다.[7]
1876년 메이지 신정부가 조슈 번 군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3천여 해직자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이 정리해고하자 강하게 반발하고는 신정부에서 소외된 불만 사족들을 모았다. 오쿠다이라 겐스케(奥平謙輔) 및 쇼카손주쿠 옛 동문들을 모아 순국군(殉国軍)을 결성하고 하기의 난을 일으켰다. 지역 군량고를 탈취하는 등 성과를 올렸으나 곧 진압됐다. 반란 실패 후 체포돼 참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43세.[7]
그는 시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2]
- 吾今国の為に死す、(내 지금 나라를 위해 죽네)
- 死すとも君恩に背かず。(죽더라도 임금의 은혜를 등질 수 없도다)
- 人事通塞あり、(인간사 통하면 막히는 일도 있느니)
- 乾坤我が魂を弔さん。(천지 나의 혼에 조의를 표하노라)
2. 4. 메이지 신정부 참여와 좌천
메이지 유신 이후 1870년(메이지 3년), 각 번의 사병들이 일본군으로 흡수되면서 마에바라 잇세이도 은상(賞典禄)으로 600석 영지를 하사받았다. 에치고 지방법원 판사에 임명되었고, 일본 중추원 참의(参議)에 올랐다.[7] 오무라 마스지로가 암살된 후에는 병부대보(兵部大輔, 국방부 차관)를 겸임했지만, 업무 태만으로 탄핵되기도 했다. 징병제 실시에 반대하여 기도 다카요시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징병제를 지지하는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에게 밀려 낙향했다.[7]2. 5. 하기의 난과 최후
1876년 메이지 신정부가 조슈 번 군대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3천여 명의 해직자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이 정리해고하자, 마에바라 잇세이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신정부에서 소외된 불만 사족들을 모아 오쿠다이라 겐스케 및 쇼카손주쿠 옛 동문들과 함께 순국군(殉国軍)을 결성하고 하기의 난을 일으켰다.[7] 반란군은 지역 군량고를 탈취하는 등 성과를 올렸으나 곧 진압되었다. 마에바라 잇세이는 반란 실패 후 체포되어 참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43세.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시로 남겼다고 한다.
- 吾今国の為に死す、(내 지금 나라를 위해 죽네)
- 死すとも君恩に背かず。(죽더라도 임금의 은혜를 등질 수 없도다)
- 人事通塞あり、(인간사 통하면 막히는 일도 있느니)
- 乾坤我が魂を弔さん。(천지 나의 혼에 조의를 표하노라)
또한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이중 의미를 담아 남기는 말)도 남겼다.
- これまではいかい御苦労からだどの よびだしの声まつむしや秋の風 。
여기서 'いかい'는 수많음이란 뜻도 되고 유언(遺誡, いかい) 혹은 저승(異界, いかい)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의 유해는 야마구치현 하기시의 고보지에 안장됐다.[8]
3. 사상과 평가
요시다 쇼인은 마에바라 잇세이에 대해 용기와 지혜, 성실함을 갖춘 인물로 평가하며, 구사카 겐즈이나 다카스기 신사쿠에 비해 재능이나 식견은 부족하지만 인물의 완전함은 뛰어나다고 보았다. 또한 잇세이를 미야베 테이조와 비슷한 자질을 가졌으며, 효성이 지극하다고 칭찬했다.[3] 다른 한편으로는 잇세이가 다카스기 신사쿠와 구사카 겐즈이에게 국가의 적이 될 수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3]
요코야마 이쿠타는 잇세이를 "극히 중후한 풍의 사람"이라고 평가했고,[4] 와타나베 슈조는 촌숙에서 독서를 많이 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4] 소가 스케준은 잇세이를 "일의 선악을 결코 말하지 않는 묘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5]
3. 1. 요시다 쇼인의 평가
요시다 쇼인은 마에바라 잇세이(야소지로)에 대해 "용기와 지혜가 있으며, 성실함이 뛰어나다. 이른바 포백(布帛)과 좁쌀(粟米)과 같아서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 재능은 구사카 겐즈이에 미치지 못하고, 그 식견은 다카스기 신사쿠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인물의 완전함은 두 아이(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가 또한 야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멀다. 나의 친구인 히고의 미야베 테이조의 자질은 야소와 매우 흡사하다. 야소는 부모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섬긴다. 나는 아직 국사를 가지고 그를 책망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3] 또, "사세 야소지로에 이르러서는 은연중에 두 낭(고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의 한 국가의 적이다."라고도 평가했다.요코야마 이쿠타는 "극히 중후한 풍의 사람"이라고 평가했고,[4] 와타나베 슈조는 "사세 야소지로는, 촌숙에서도 그다지 독서를 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4] 소가 스케준은 "묘한 사람으로, 일의 선악을 결코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했다.[5]
3. 2. 후대의 평가
요시다 쇼인은 마에바라 잇세이(야소지로)에 대해 "용기와 지혜가 있으며, 성실함이 뛰어나다. 이른바 포백(布帛)과 좁쌀(粟米)과 같아서 적용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 재능은 구사카 겐즈이에 미치지 못하고, 그 식견은 다카스기 신사쿠에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인물의 완전함은 두 아이(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가 또한 야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멀다. 나의 친구인 히고의 미야베 테이조의 자질은 야소와 매우 흡사하다. 야소는 부모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섬긴다. 나는 아직 국사를 가지고 그를 책망할 수 없다."라고 평가했다.[3] 또한 "사세 야소지로에 이르러서는 은연중에 두 낭(고다카스기 신사쿠, 구사카 겐즈이)의 한 국가의 적이다."라고 평가했다.요코야마 이쿠타는 "극히 중후한 풍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4]
와타나베 슈조는 "사세 야소지로는, 촌숙에서도 그다지 독서를 하지 않았다"라고 평가했다.[4]
소가 스케준은 "묘한 사람으로, 일의 선악을 결코 말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라고 평가했다.[5]
4. 가족 관계
5. 등장 작품
참조
[1]
Kotobank
前原一誠
[2]
서적
明治の事件史―日本人の本当の姿が見えてくる!
青春出版社
2004-03-20
[3]
서적
松陰とその門下
[4]
서적
吉田松陰全集 第12巻
[5]
간행물
大村先生逸事談話
[6]
서적
松下村塾の明治維新 : 近代日本を支えた人びと
ミネルヴァ書房
1999
[7]
문서
[8]
문서
山口県 萩市 土原 606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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